나의 자작글

[스크랩] 연길에서 띄우는 편지 #6

Annylee 2006. 3. 10. 09:52

중국 연길에서 #2 004.jpg


토요일의 여행 일정은 용정, 화룡, 김일성 낚시터, 두만강 발원지, 숭산,으로 되어있다.
아침 8에 학교에서 출발하여 한시간여를 달리니 용정에 다다른다. 용정하면 좀 낮설지만
우리 어르신들이 일제시대에 보따리 싸들고 북간도로 이민을 떠나 정착한곳이 용정이며
이곳이 조선족의 발원지가 되었다. 일제시대는 간도라고 불리웠고 그후에 조선족이
몰려살고있어서 조선민족의 정기를 자르고 중국에 완전히 귀속 시키기 위해
이름을 간도에서 용정으로 바꾸었다한다.
용정중학교에 들르니 기념관 앞에 윤동주 시비가 있고 정일권 전국무총리, 문익환목사,
강원룡목사 ,일제 하에 항일운동 하시던 그 많은 분들이 기념관에 사진으로 모셔져 있었다.
여기에서 난 윤동주 시인과 정일권 전총리의 일화를 간단히 소개 하고져 한다.
윤동주 시인하면 유명한 <서시>가 있다.

“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이시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하는 명시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도 널리 애송되어지며 아까운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으니
일제의 만행에 울분을 금할 수가 없다.

시인의 일생을 간단히 소개하면
1917년 12월 30일,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지금은 용정시에 귀속)
에서 태어났으며,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평양 숭실중학, 등을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기까지(1941년) 학교생활은 활동적이었다.
일본에 건너가 도꾜 립교대학 영문과에 입학(1942년)하였으나 그해 가을 다시
도꾜 동지사대학으로 편입, 학업과 시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길에 오르던중 항일민족 사상범 혐의로 일본형사에 검거되어
복역중에 일본인들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오다가 결국은 옥사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나이 28세였고 그날은 1945년 2월 16일 이었다.
시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는 시인이 생전에 출간하고져 하다가
출간을 못하고 두었던 시고를 수집 정리하여 후에 펴내었다.

그리고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소년시절의 일화가 아직도 조선족 사이에서
구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정 총리의 용정중학 시절에 집안이 곤궁하여 학비를 마련하느라 껌팔이를 하였다.
정 소년이 하루는 껌을 팔기 위해 간 곳에 독립운동 하시는 애국지사들이 많이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어느분이 정 소년에게 묻기를 “너는 이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겠는가?”고 물었더니
소년의 대답이 “저는 커서 우리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여
그 자리에 모인 애국지사들이 소년의 모자에 가득 학비를 걷어 주었는데
그 돈이 3년 동안 학비에 충분한 돈 이었다한다. 그 소문을 듣고 어느 사람이
정 소년의 돈을 훔치게 되고 결국은 그 도둑을 붙잡았으나 정소년은 그 도둑을 벌하게 하지
않아서 역시 큰 인물로 그때부터 이름이 났었고 그 당시에 신문에도 게제가 되었다한다.

그 다음은 일송정을 보러 갔는데 용정 시내의 서쪽 산꼭대기에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옆에 정자가 있는데 이곳 역시도 길 공사로 인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서 화룡시로 통하는 큰길가에 정차하여 먼발치에서 구경만 할수있었다.
일제시대에 용정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일송정에 모여서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조선족들이 함께 모여 기우제도 지내었다. 일제하에서 조선인의 정기를 말살할 목적으로 원래의 소나무는 베어졌다. 그 이후에 연변 자치주에서 다시 소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 한 그루가 있는데 가까이서는 못보고 먼발치에서 보노라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화룡시를 지나는 길이 어찌나 험한지 길공사가 한창이어서 22인승 마이크로 버스가 얼마나
불편하고 요동이 심한지 엉덩이가 아플 지경이었다.
길 공사를 하면 우리한국같이 한쪽을 끝내고 다른쪽을 하면 좋으련만 왜 길을 모두
파헤쳐 먼지 풀풀 날리고, 심지어는 팔가자진의 시내한복판은 길을 모두 파헤쳐 놓아
시민들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나가는 여행객들도 불편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산악지대를 몇시간 달려서 두만강변에 다다르니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이 보였다.
중국땅하고 북한땅하고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은 북한의 산들은 모두 개간을 하여서
민둥산이고 중국의 산은 정말 밀림지대 같이 나무들로 빽빽하다.

식량증산을 목표로 산을 개간하였으나 땅이 메말라서 옥수수 정도 심을수 있으며
옥수수는 토지를 계속 황폐화 시켜 다른 곡식은 잘 크질 않는다고 한다.
산비탈에 심은 농작물은 비만 오면 모두 떠내려가서 별 소득도 없다한다.
군데 군데 작은집단 농장도 보이고 산비탈에는 “21세기 우리의 태양 김정일 만세”라고
쓰인 구호가 선명하게 보였다. 내뒤에 함께 여행하던 독일인 교수가 무슨 구호가
적혀 있느냐고 물어와서 통역을 해주니 어이없어 한다.

어렵게 김일성이가 두만강에서 낚시 하던곳에 다다르니 국경초소라서 검문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여행사에서 단체로 갔기에 개인별 검문은 없고 그냥 통과하였는데 검문소 바로 옆이
낚시터 였다. 조금마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불과 20 미터정도)저쪽에서 북한 병사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흔들며 소리지르고 하였으나 미동도 하지 않는 북한 병사들이었고, 조그만 바위 하나있는데 그곳에서 낚시를 하였다나? 참으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도 구경거리라고 좋다고 하면서 우리를 도로도 억망이고 산비탈을 지루하게
달려서 점심도 2시경에야 먹고 국경초소라서 함부로 못 들어오는 곳을 우리는
자기회사가 교섭을 잘하여 국경초소를 들어올수 있었다고 가이드가 생색을 얼마나
내었는가? 그걸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다음은 이곳에서 6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두만강의 발원지를 가보았다.
이곳은 북한하고는 경계선이 없고 철책도 없이 그냥 산으로 이여졌다.
아래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어서 강을 경계선으로 삼았지만
이곳은 평지로 숲만 무성하였다.
두만강의 발원지인 이곳은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물줄기하고 땅에서 솓아나는
물줄기가 합쳐져서 두만강의 시초가 되는 발원지인 곳이다.
약간의 보람을 느끼기는 하였으나 크게 감동을 할 곳은 아니었다.
벌써 시간은 오후 4시가 가까이 되어오고 있어서 우리는 서둘러서
마지막 행선지인 숭선으로 향하였다.

숭선의 고성리 변방검문소에 다다르니 그야말로 50미터 정도 되는 다리를 사이에두고
북한과 중국인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다리위에는 철책으로 막아놓았고
중국쪽은 중국 공안원이, 그리고 북한초소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북한쪽에는 어린아이들이 서너명 뛰어놀고 있었으며,
농부들이 트럭위에 가득타고 오는 것을 보니
함께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거나 다른 농장으로 이동하는 듯 했다.

이곳이 우리들의 오늘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 인 것이다.
벌써 시간은 5시가 되었고 다시 연길로 돌아가는 시간은 적어도
4시간반이 걸리니 갈길을 재촉해야했다.
거리상으로는 4시간이면 충분하게 다닐수 있는데 6시간을 넘게 달려왔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가이드가 지루한 우리에게 웃기느라고 북한말 몇가지를 알려주었다.
예를들면 : 전등은=불알, 남자팬티는= 볼록싸게 여자팬티는= 오목싸게
에어콘은= 공기 조절기등. 그래서 한참 웃었다.

연길에 돌아오니 저녁 9시30분이 되었으나 저녁을 못먹어서 우리는 무리지어
연길에서 유명하다는 뀀성(꼬치구이) 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연길에서는 음식은 개고기집, 뀀집, 그리고 맛사지가 유명하다.
발 맛사지를 받으러 가고 싶은데 시간이 안되어 못가고 있는데 언젠가는 경험을 하기위해
가 볼 계획이다.
오늘 오후부터는 중국어 클래스가 시작되어서 바쁘게 지내게 되었다.
지금 시간이 점심시간이 시작되어 서둘러서 끝맺음을 하려니 두서없이 써내려간 문장에
말이나 제대로 통하게 썼는지 한번 검토할 시간도 없이 올리려니 좀 미안하기도 하다.
다시 생각나는대로 후기를 쓰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안녕....
여러분들 여기까지 읽으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어요. 어휴 저도 힘이 드네요.
7월 5일에
연길에서 애니드림


 

아바타 꾸미기

첨부이미지
출처 : 향이그윽한 애니의 홈입니다..
글쓴이 : Anny 원글보기
메모 :